▣ 금오신화의 출전과 작품 전래 과정
학계나 문단을 통해 발견된 소설작품을 놓고 볼 때, 2014년 현재 우리 선조들이 남긴 최초의 소설집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던 <금오신화(金鰲新話)>는 <최치원전>의 발견으로 최초냐, 두 번째냐로 논란 중인 이 소설집은 조선 초기 문인 매월당 김시습 선생이 지은 한문 단편소설집이다.
이 소설집에는 1)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만복사 저포놀이) 2)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이생이 담 넘어 아가씨를 엿보다) 3)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홍생이 부벽정에서 취하여 놀다) 4)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남쪽 염부주 이야기) 5)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용궁 잔치에 초대받다) 등 5편의 한문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선생의 소설 작품들은 창작 당대부터 희귀본이어서 옛 문헌에 이따금 단편적인 기록만 남아 있을 뿐 한말 이래 국역본이든 한문본이든 작품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다 일본에서 전해오던 목판본 <금오신화>를 최남선(崔南善) 선생이 발견해 잡지 <계명(啓明)> 19호를 통해 1927년 국내에 소개했다. 이 목판본은 1884년(고종 21) 동경에서 간행된 것이며, 상·하 2책으로 구성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중 상권은 32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서(序)> · 〈매월당소전(梅月堂小傳)〉 · 〈만복사저포기〉·〈이생규장전〉 · 〈취유부벽정기〉 등이 실려 있고, 하권은 24장으로 구성되었는데 〈남염부주지〉 · 〈용궁부연록〉 · <발문> · <평(評)> 등이 실려 있다. 이 글 중 〈매월당소전〉과 <발문> 2편 가운데 1편은 1882년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갔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개화파 지식인 이수정(李樹廷) 선생이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권 끝에는 이 작품집을 <갑집(甲集)>이라고 구분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의 작품 수는 5편 이상이었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이 목판본 <금오신화>는 1653년(효종 4) 일본에서 초간(初刊)되었던 것을 재간(再刊)한 것이며, 초간의 대본은 오쓰카(大塚彦太郎) 가문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자료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동경판 ≪금오신화≫가 소장되어 있으며, 편역자가 이번에 편역한 작품들은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1950년대에 발간된 한문본과 국내 대학의 연구자들이 텍스트로 활용한 작품들을 두루 대조해 보며 저본으로 삼았음을 밝혀둔다. ●
[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
▣ 작품 소개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은 금오신화에 수록된 단편소설 중에서 가장 사상예술성이 높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이다. 다섯 편의 소설 중 <만복사저포기>와 <취유부벽정기>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랑의 대상이 처음부터 현세에서 억울하게 생명을 빼앗긴 신적인 존재로 등장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남녀주인공이 다 현실적인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 특성이 있다.
소설 제목으로 일컬어지는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이라는 한자어 제목을 한글로 번역하면 <이생이 담 넘어 아가씨를 엿본 이야기>라고 풀이되는데, 이 작품에서 이생이 엿본 담장 안의 세계는 그가 한눈에 반한 최랑(崔娘)이라는 연인이 사는 집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작품을 다 읽고 나면 담장 안은 천륜과(天倫)과 절의(節義)를 저버리고 권력을 찬탈한 계유정란의 실세들이 모여 있는 궁궐 안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그리며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소설 줄거리는 송도(松都, 지금의 개성)에 이생(李生)이라는 총각과 최랑(崔娘)이라는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이생이 날마다 국학에 공부하러 갈 적이면 최랑의 집 담장 곁을 지나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생이 담장 안을 잠깐 엿보다가 수를 놓고 있는 최랑을 발견하게 된다.
최랑은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바늘을 슬그머니 멈추더니 수심 어린 듯 턱을 고이고 시 한 구절을 조용히 읊는다. 이생은 최랑이 읊는 시 낭송 내용을 알아듣고 난 뒤부터는 마음이 산란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저녁때 공부하고 돌아오던 길에 연정을 담은 시 한 수를 적어 기와 조각에 매달아 최랑의 집 담장 안으로 던진다.
이렇게 되어 최랑과 이생은 사랑이 맺어지고 이생은 날마다 최랑의 집 담장을 넘어 들어가 정을 나누다 운우지정까지 나누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생은 더는 최랑을 찾아갈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이생의 아버지가 아들의 행실을 눈치 채고 그를 최랑이 모르게 고향인 울산으로 내려가 하인들 농사일이나 감독하라며 내쫓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전혀 알 수 없는 최랑은 저녁마다 이생을 기다린다. 최랑은 여러 날 동안 이생의 소식을 몰라 애태우다 마침내는 시녀 향아를 통해 이생이 아버지의 꾸중을 듣고 울산으로 쫓겨 간 지 벌써 여러 날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자리에 드러누워 상사병을 앓게 된다.
최랑의 부모는 딸이 병이 난 원인을 알고 매파를 보내 이씨가(李氏家)에 청혼한다. 그러나 이씨가는 가난한 선비로서 고문세족의 최씨가(崔氏家) 가문과 통혼하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최씨가는 이씨가와 통혼함으로써만 딸을 죽을병에서 살려 낼 수 있겠기에 납채(혼인을 청하는 의례)를 보내는 예물과 신랑신부를 맞이하는 일체 혼수들을 모두 자기 측에서 담당하겠다고 하면서 어떻게든 이씨가와 통혼하려고 한다.
이씨가도 더 이상 최씨가의 끈질긴 청혼을 뿌리칠 수 없어 마침내는 뜻을 돌려 자기 아들과 결혼하기로 약속한다. 이리하여 이생과 최랑은 끊어졌던 인연을 맺고 부부가 되어 서로 극진히 사랑하며 살아간다. 이생은 결혼 이듬해에 과거에까지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되고 조정에까지 그 이름이 드러난다.
두 사람의 행복은 절정에 달하게 된다. 그렇지만 꿈에도 생각지 못한 홍두적(홍건적)의 침입으로 양가의 부모는 물론 사랑하는 아내까지 죽고 간신히 이생만 살아남게 된다. 깊은 슬픔에 잠겨 있던 이생 앞에 어느 날 최랑이 환생하여 나타난다. 최랑을 열렬히 사랑한 이생은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다시 예전처럼 함께 수년간을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최랑은 이승에서 인연이 다했다고 말하며 내버려져 있는 자신의 유골을 추스려 묻어달라고 부탁하고 사라진다. 이생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음날 최랑의 뼈를 찾아 묻어준다. 그 뒤로도 이생은 최랑을 매일같이 그리워하다가 병을 얻어 죽는다…….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귀신이 된 아내에 대한 절의(絶義)를 끝까지 지키다 병을 얻어 죽어버린 이생의 이야기로 끝나지만, 이 작품도 <만복사저포기>란 작품과 맥락이 거의 똑같은 이야기이다.
전해오는 야화를 뒤적이다 보면, 세조 재위 당시 조선의 문풍을 주도하는 최고의 자리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오늘날의 교육부 장관급)을 무려 26년이나 역임했던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과 김시습은 친했다고 한다. 또 세조의 아버지였던 세종 생존 시 김시습은 <오세신동(五歲神童>으로 불렸고 세종으로부터 “잘 키워라. 앞으로 크게 쓰일 것이다.”라는 어명까지 받을 만큼 문명을 떨치던 장본인이라 이 <금오신화>도 분명 조선왕실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이다.
만약 이 작품이 조선왕실로 들어가 세조가 이 작품을 읽었다면 심정이 어땠을까? 그리고 세조 밑의 여러 중신들이 이 작품을 읽었다면 말할 수 없을 만큼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 같은 상상이, 지금도 쿡! 웃음을 치솟게 만들면서 우리들을 순간적으로 긴장시키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 <이생규장전>이라는 단편소설은 단순히 세조를 비판하는 해석 말고도 김시습이라는 작가 자신의 인생관으로도 해석이 될 수 있는 여지가 보이는 작품이다. 한미한 서생 이생과 대갓집 규수와의 사랑? 당대 사회에선 참 힘든 일일 것이다. 이는 곧 작가 김시습이 걸어갔던 길과도 일맥상통한다.
그가 걸어간 길은 정말 쉽지 않은 길이었다. 그 진짜 이유야 어찌되었든 단종에 대한 절의(絶義)를 위해 <오세동자> <오세신동>이란 별호가 뒤따랐던 천재였음에도 변변한 벼슬길 한번 나가지 못하고 전국을 유랑하다, 결국 나이 59세에 충청도 홍천 무량사에서 쓸쓸히 죽었으니 말이다.
이런 맥락에선 <홍두(건)적의 침입> 같은,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시련은 김시습 개인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당대 현실의 정치사회적 억압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생규장전>에서 작가 김시습은 이걸 어떻게 그려냈는가? 비록 홍두적에 의해 최랑이 죽었지만, 이생은 그 최랑의 혼령을 사랑하다 죽는다. 자신이 처한 현실이 어떻건, 자신이 가는 길이 거대한 시대조류를 거스르든 말든, 비록 일개 개인의 미미한 힘일지라도 작가 김시습은 자기 갈 길을 갈 것이라는 의미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가치와 작가의 작품 창작 의도는 바로 여기서 집약된다. ●
▣ 작가 소개
미수 허목(許穆) 선생이 쓴 청사열전(淸士列傳)에 “김시습(金時習)은 본디 창해(滄海:강릉) 사람이다. 태어난 지 8개월에 글을 읽을 줄 알았으며, 5세에 <대학(大學)>ㆍ<중용(中庸)>을 환히 읽어 어른도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집현전(集賢殿)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그를 보고 ‘뛰어난 인재이다.’ 하면서 이름을 시습(時習), 자를 열경(悅卿)이라고 지어 주었다. 세종이 이 소문을 듣고 불러 보고자 하였으나 임금의 신분상 그럴 수 없어서 승정원을 시켜 불러다 보고 그의 집에 많은 하사품을 내리면서, ‘잘 키워라. 크게 쓰일 것이다.’ 하였다. 이리하여 사방에서는 그를 ‘오세동자(五歲童子)’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라고 한다.
이처럼 유년시절부터 문명을 떨치며 성장한 김시습은 1435년(세종 17) 한양 성균관 북쪽, 그러니까 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에서 아버지 김일성(日省)과 어머니 울진 선사장씨(仙槎張氏) 슬하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대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서 국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즉위하지 못하고 명주(溟州·강릉) 군왕(郡王)으로 봉함 받았던 김주원(金周元)이었다. 할아버지 김겸간(謙侃)은 오위부장을 지낸 무반이었고, 아버지 김일성(日省)은 선대의 음서(蔭敍)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사대부가의 후손이었으나 그가 태어날 무렵 가정환경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는 3살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해 <정속(正俗)>, <유학자설(幼學字說)>, <소학(小學)>을 배운 후 5세 때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아 그가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이 당시의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알려졌다는 내용이 어숙권(魚叔權)이 지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전해지고 있다.
이 외에도 그의 생애를 알려주는 자료로는 <매월당집>에 전하는 <상류양양진정서(上柳襄陽陳情書)>, <윤춘년(尹春年)의 전기(傳記)>, <율곡 이이(李珥)의 전기>, <음애 이자(李耔)의 서문(序文)>, <장릉지(莊陵誌)> · <해동명신록> · <연려실기술> 등이 있는데, 그는 5세 때(1439년) 이웃집에 살고 있던 예문관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으로부터 <중용>과 <대학>을 배웠고, 그 후 13세 때(1447년)까지 이웃집의 성균관 대사성 김반(金泮)에게서 <맹자> · <시경> · <서경>을 배웠고, 겸사성 윤상(尹祥)에게서는 <주역>과 <예기>를 배웠으며, 그 밖의 여러 역사책과 제자백가는 스스로 읽어서 공부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작가 김시습의 생애> 편을 참조하기 바람). ●
▣ 편역자 소개
서동익(徐東翼)
소설가. 서동익은 1948년 경북 안강(安康)에서 태어나 향리에서 성장기를 보내다 1968년 해군에 지원 입대해 7년간 현역으로 복무했다. 만기 전역 후, 6·25 한국전쟁 휴전협정 체결 후 남북 관계와 북한 동포들의 삶을 연구해 오다 1997년 국가정보대학원을 수료했다.
1976년 중편소설 <갱(坑)>으로 제11회 세대신인문학상을 수상하고 등단 후 남북 분단으로 인한 <한국현대소설문학의 반쪽현상>과 <왜소성>을 발견, 이를 극복하는 장편소설을 집필하다 북한 동포들의 일상적 라이프스타일과 생활용어 속의 정치용어, 경제용어, 은어 등에 막혀 실패했다. 이후 직장을 대북전문기관인 자유의 소리방송(전문집필위원), 통일부(학술용역), 국방일보(객원논설위원), 인천남동신보(주간 겸 논설위원), 사)북방문제연구소(연구이사 겸 부소장) 등에서 근무하며 30여 년간 북한을 연구해 왔다.
주요 북한연구저서로는 <북에서 사는 모습(북한연구소, 1987)>, <인민이 사는 모습 1, 2권(자료원, 1996)>, <남북한 맞춤법 통일을 위한 사회주의헌법 문장 연구(사단법인 북방문제연구소, 2007)>, <남북한 맞춤법 통일을 위한 조선로동당 규약 문장 연구(북방문제연구소, 2007)> 외 다수 논문이 있다.
문학창작집으로는 서동익 소설집 <갱(坑, 자료원, 1996)>, 장편소설집 <하늘 강냉이 1∼2권(자료원, 2000)>, <청해당의 아침(자료원, 2001)>, <퇴함 1∼2권(메세나, 2003)>, <장군의 여자 1∼2권(메세나, 2010)>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 <청해당의 아침>이 1960년대 한국의 문화원형과 전후세대의 삶을 밀도 있게 묘사한 작품으로 선정되어 2010년 6월 1일부터 한 달간 KBS 라디오 드라마극장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어 국내는 KBS AM 972khz로, 국외는 KBS 한민족방송망을 타고 중국 동북3성 ․ 러시아 연해주 ․ 사할린 ․ 일본 ․ 미국 등지로 방송된 바 있다.
고소설 편역작품집으로는 강도몽유록(OLIN, 2013), 달천몽유록, 원생몽유록, 안빙몽유록, 수성궁몽유록, 피생명몽록, 금오신화(OLIN, 2014) 등이 있다.
그동안의 창작활동으로 <제8회 인천문학상(1996)>, <남동구민상(1996)>, <인천광역시문화상(2004)>, <남동예술인상(2011)> 등을 수상했으며 <해군을 빛낸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사회단체활동으로는 인천광역시남동구문화예술회 창립추진위원장, 초대회장(1991), 한국문협 인천광역시회 제33대 회장(2003), 한국예총 인천광역시연합회 부회장(2004), (사)북방문제연구소 부소장(2007) 등을 역임한 바 있으며 현재는 <(주)온라인인물뉴스(www.olinews.com)> 대표이사로 재직하고 있다.(편집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