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직과 김교재가 공동 창작한 신소설 《치악산》 상 · 하편은 못된 시어머니와 시누이로 인해 고통당하는 착한 며느리의 고생담을 그린 소설이다. 결말에는 악한 인물도 모두 회개하여 새사람이 되고, 착한 인물인 며느리도 그동안의 고난이 모두 해결되어 집안 모두가 화목하게 잘 산다는, ‘권선징악’을 이야기하는 전형적인 가정소설 유형이면서도 신소설의 서사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신소설의 문학사적 특징은 일반적으로 문체가 묘사적이란 점이다. 고대소설이 설화체에 그치는 점과 대조를 이룬다. 또 소재 채택과 사건 전개에 있어서 본질적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에 비해 고대소설은 예외 없이 소재를 비현실적인 데에서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신소설에서는 그 소재들이 대체로 우리 주변에서 일상 일어나는 것들이다. 그 사건 또한 현실적으로 가능한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신소설이 고대소설보다는 근대소설 쪽에 한 걸음 더 다가섰음을 뜻한다.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암기하듯 달달 외운 기억이 있는 신소설의 연대기적 개념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일본에 예속되어 가던 약 15년간의 조선 사회의 황폐한 구조와 당대인의 삶의 양상을 잘 담아낸 서사 양식으로 이인직을 비롯해 이해조, 최찬식, 안국선, 장지연 등 1918년 이광수의 《무정》이 나오기 전까지 창작되거나 발표된 소설들을 한국문학사에서는 ‘신소설’로 분류하고 있다.
이 신소설 작품들은 개화기 수백 년간 지속되어 온 봉건 질서의 해체와 새로운 식민자본주의의 형성기를 배경으로 한 우리나라 개항시대의 시대적 이념을 형상화하는데 가장 야심적이고 대표적인 서사 양식이었다. 그러므로 신소설은 이때 가장 광범위한 독자층을 형성하였다.
그중에서도 최초의 신소설인 이인직의 《혈의 누》를 비롯해 이해조 최찬식 등에 의해 왕성하게 창작되었으며, ‘문명개화’, ‘풍속 개량’ 같은 근대화의 이념이 이들 소설의 일반적인 주제가 되었다. 봉건 질서에 대한 부정과 비판, 새 문명에 대한 예찬이 대대적으로 그리고 공공연하게 행해졌던 당시의 이상과 환상이 당시 창작된 신소설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한국문학사를 공부하거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신문학을 연 작가들의 문학작품을 한 번 정도는 꼭 필독해야 할 작품으로 당위성(當爲性)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흔히 《치악산》은 이인직의 전작으로 알려져 있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이 작품의 저자는 두 명이다. 이 작품은 <상 · 하> 두 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중 <상편>의 작가는 이인직, <하편>의 작가는 김교제로 밝혀졌다. 어떤 이유로 이인직 생존 시 발간된 이 신소설의 하권이 김교제가 쓴 공동창작품으로 발표되었는지 그 사연과 이유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 없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공동 창작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문학사적 의의를 내포하고 있는 작품이다.
<상 · 하> 두 권의 작품 중 이인직(李人稙)이 쓴 <상편>은 1907년 9월 당시의 일간 신문이었던 『만세보』에 연재된 후 1908년 유일서관에서 초판이 출간되었다. 김교제(金敎濟)가 쓴 <하편>은 1910년 동양서원(東洋書院)에서 초판이 출간되었다. 하편을 쓴 김교제는 당대에 이인직만큼 잘 알려진 작가는 아니다. 그렇지만 많은 작품을 남긴 근대계몽기를 대표하는 소설가이다. 특히 《비행선》(1912)과 《일만구천방》(1913) 등 오늘날로 치면 SF소설을 주로 번안한 작가이다.
본서는 1908년 유일서관에서 초판 간행된 이인직의《치악산》상편과 1910년 동양서원에서 간행된 김교제의《치악산》하편을 일반 독자들이 국어사전이나 옥편 없이 그대로 줄줄 읽을 수 있도록 고어체 원고를 현대어 가로쓰기 전자책(이펍 2.0) 판형으로 번역한 편역본에다 최초 발표된 이인직의 《치악산》 초판본을 <책 속의 책> 형태로 삽입한 전자 도서이다. 그러므로 이 전자책 한 권으로 초판본 원본과 현대문 번역본을 대조해 가며 함께 읽을 수 있는 재미와 실리를 구현할 수 있다. ●
■ 저자 김교제(金敎濟)
일제강점기 《목단화》 《비행선》 《현미경》 《치악산(하편)》 등을 저술한 작가로 널리 알려진 아속(啞俗) 김교제(金敎濟)는 1883년 11월 3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필명 또는 아호는 아속(啞俗), 아속생(啞俗生) 등을 사용했다.
충북 회인군(현, 충북 보은군) 군수를 역임한 바 있는 김상오(金商五)의 아들로 태어나 22세 때인 1905년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소재하는 헌릉과 인릉에서 종5품직인 참봉(임기 2년), 1907년에는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정5품직인 효릉령에 임명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수학 경력과 생몰년 등 생애 전반에 관한 명확한 이력 사항이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아마도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관원의 신분을 잃게 되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추정되며, 중국어로 번역된 서양소설을 읽고 번안한 사실과 20대에 이미 종5품에 이어 정5품에 해당하는 관직에 올랐던 기록으로 볼 때, 김교제는 이인직 · 이해조 경우처럼 양반 계층의 유교적 가풍 속에서 어렸을 때부터 이미 향리에서 한문 교육을 충실히 받고 생원시 이상의 과거에 합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작품은 흥미 위주의 오락성을 추구하여 문학적 가치 면에서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지만 당대 대중들에게는 큰 인기를 끌었다. 전대의 계모형 가정소설 구조를 본떠 개화와 보수의 대립을 선악의 대립으로 대치시켰고, 신소설 작품 속에 개화사상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주제와는 상관없이 부분적으로 삽입되어 있다는 비평도 받고 있다.
김태준은 《증보 조선소설사》에서 그의 작품에 대해 문학적 수준은 낮다고 평가하면서도 이인직ㆍ이해조ㆍ최찬식과 함께 신소설 4대 작가로 꼽았다. 이인직이 1911년 <상편>만을 쓴 신소설 《치악산》의 하편을 써서 완성하였는데, 상권에 비해 소설의 짜임새가 느슨하여 이인직이 내세웠던 개화사상에 기대는 듯하다는 평을 받은 바도 있다.
최초의 작품 활동 사항은 1909년 『대한매일신보』에 《타조가》, 《권주가》 등의 창가 작품을 발표한 것이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앞선 최초의 작품 활동 기록이다.
그 후, 소설작품으로는 1910년 첫 작품 《목단화(牧丹花)》 외에 그다음 해인 1912년 이인직이 쓴 《치악산(雉岳山)》의 속편인 《치악산》하편을, 그리고 《비행선(飛行船)》(1912) · 《현미경(顯微鏡)》(1912) · 《지장보살(地藏菩薩)》(1912) · 《일만구천방(一萬九千磅)》(1913) · 《난봉기합(鸞鳳奇合》(1913) · 《쌍봉쟁화(雙峰爭花)》(1919) · 《애지화(愛之花)》(1920) · 《경중화(鏡中花)》(1923) 등 1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김교제의 자세한 작품 활동 내역은 <김교제의 출생과 작품활동 연혁>을 참고하기 바란다. (편집자) ●